열린 방 An Open Room
Kwon Inkyung
M’VOID is a program that plans and presents exhibitions of leading artists at home and abroad who question contemporary aesthetic values while strengthening their works with insights.
ABOUT
작가노트
우리는 시공간을 경험하는 4차원에 살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3차원적 시각일 뿐이다. 그 이면의 것들을 우린 보지 못한다. 심지어 스스로를 바라보지도 못한다. 삶의 필수조건인 방은 그 곳에 거주하는 이의 확장된 영역이다. 그 존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다.
큐브의 공간으로 대변되는 방의 모습을 관찰하며 사람을 들여다본다. 인간의 외형적 모습만을 관찰한다면 단편적인 모습을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방은 삶의 궤적이 녹아 있기 마련이어서 그 존재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거주하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들로 변하게 되는 방의 모습은 방주인과 지극히 닮아있다.
각각의 삶이 투영된 수많은 방들은 각각의 삶으로 흘러간다. 아파트의 창들은 모두 같은 모양과 크기, 그리고 같은 방향으로 나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상이몽처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뿜어낸다. 내부적으로는 철저히 닫혀 있는 공간이겠으나 바깥에서 바라보면 창을 통해 열린 공간으로 연결되면서 각 방의 서사가 안과 밖을 넘나들며 흘러간다.
또한 그 방들 하나하나는 기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기억은 침대 모서리부터 책장 사이, 방의 한구석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내러티브로 서려 있는데, 때로는 불현듯 되살아난 기억의 조각들로 인해 깊숙한 마음 바닥의 기억들이 활성화되고 당시의 정서가 생생하게 소환되기도 한다. 기억과 장소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익숙한 내 삶의 공간과 낯선 타인의 공간의 관찰을 통해, 나를 그리고 타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들여다본다. 그리고 단순한 흔적이 아닌 기록으로, 서로 다른 그곳의 풍경들을 펼쳐본다.
열린방
이번 전시에서 권인경은 방이라는 공간에 집중한다. 방은 개인의 연장, 또는 확장으로 간주된다. 작가인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을 말했을 때, 그곳은 자폐적인 공간이기보다는 세계로 열린 일종의 플랫폼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예술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린다는 것은 그 전에 닫힘을 전제한다. 자기가 없다면 그저 세계에 흡수될 것이고, 자기만 있다면 세계는 그저 자신을 비추는 거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두 극단은 모두 문제적이다. 살아있는 생명은 세포막의 차원에서부터 닫힘과 열림이 유동적이다. 그래야 그가 던져진 세계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다. ‘개인의 방’은 심리적인 차원이 강조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의 작품들에 대해 ‘각 인간들의 최소 안식 공간인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 심리적 상황, 떠오르는 상념들, 수집하는 대상들’을 다룬다고 밝힌다.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있는 지인에서 출발했지만, 이러한 난관은 정도의 차이일 뿐 현대인이 겪고 있는 보편적 상황이다.
같은 외부 풍경이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개인이 있으며, 작품에서는 그런 개인의 공간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 있는 개인의 관점이 평등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 문제다. 원근법적 세계는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강력한 지배적 관점이 고정되는 것이 문제다. 장기적으로 고정된 체계는 궁극적으로는 변화하지만, 개인의 시간은 너무 짧다는 것이 문제다. 권인경의 작품이 다소간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시점을 운용하는 것은 지배적 관점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로다. 장면 또는 풍경은 건축적 구조를 따라 펼쳐지지만, 그 구조들이 실제 건축처럼 합리적이지는 않다. 공간 사이에 언제든 새로운 공간이 끼어들 수 있고 또 사라질 수 있다. 한 화면에 많은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촘촘하게 구획된 구조다. 합리적 공간의 선형적 이동에 따른 단일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기가 다성(多聲)적으로 들려온다. 현대인에게 분리된 독립 공간은 누구나 원하는 물리적, 심리적 자원이다.
방 안에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외부적 사회관계로부터 탈주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밖으로 나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 선택이지 강제가 아니다. 작품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방의 풍경들은 사람의 흔적을 보여준다. 심리적공간이라고 해서 ‘단순한 흔적’이어선 안되고 ‘기록으로 서로 다른 그곳들을’ 남기는 것이 목표라고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기억이 스며있는 현대적인 사물 뿐 아니라, 고서를 꼴라쥬하는 형식에서 나타난다. 기억은 현재에 국한되지 않고 시간을 넘나든다. 작품 속 가구나 건축적 구조 등에 주로 꼴라쥬 된 고서는 ‘말이 내뱉어진 순간’을 고착하는 것이며,
‘언어가 삶에 묻어’있음을 강조한다. 고서에 적힌 언어라서 고풍스럽지만, 그 또한 지금의 상용어처럼 한 시대의 지배적 언어였을 것이며, 주체를 구성했을 것이다. 인류학이나 언어학이 밝힌 바에 의하면. 그 사회의 지배적 언어를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대상/기호, 기표/기의가 분리되는 언어 자체의 분열적 조건에 당면한다.
‘환자’는 이 조건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 일 따름이다. 속해야 하지만, 완전히 속하기 싫은 애증에 찬 구조이다. 정신분석학을 비롯하여 모든 종류의 구조적 이론에 저항하는 저자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카오스모제]에 의하면, 상징적 질서는 결정론적인 납 망토처럼 죽음의 운명처럼 무형적 세계를 짓누른다. 그에 의하면 말(발화)은 법의 차원, 즉 사실, 동작, 감정의 통제 차원에 고정된 문자적인 기호학의 지배 아래 통용될 때 공허해진다. 가타리는 정신분석학을 염두에 둔다. 마단 사럽이 해석하는 라깡의 심리학 이론에 의하면 상징계를 통해 주체가 구성되므로, 주체가 태어나기도 전에 담론에 의해 그에게 할당되는 장소가 있다. 상징계가 자율적인 구조가 될 때 인간의 자리는 과연 있을 것인가. 이러한 결정론으로부터 인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방이라는 구조적 공간을 개인과 비유하면서 종횡무진 연결망을 구축하는 것은 구조를 인정하면서도 넘어서려는 방식이다.
권인경은 다양한 형식을 실험하고 있으며, 그렇다고 형식주의는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삶에 대한 서사는 인간이 등장해야 자연스럽지만, 작품에는 정작 인간이 없고, 간혹 뜬금없이 등장하는 의자는 인간의, 요컨대 부재함으로서 현존하는 자리를 상징한다. 인간관계로부터 출발하는 현대적 병이 있지만, 작가이기에 자기 안에만 머물 수도 없다. 방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가까운 이가 어릴 적 외상후 스트레스 증상을 앓았고, 이후 오지랖 넓은 한국 사회 특유의 집단 폭력을 겪으면서 외부와 단절된 상황과 관련된다. 타인과의 언어적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그는 방에서 잘 나오지 않지만, 문을 조금은 열어 놓는다고 한다. 세상과의 조그만 통로의 확보이다. 하지만 정상/이상의 관계는 유동적이다. 정도의 문제일 뿐 보통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우호적인 외부로부터 보호받으려는 본능이 개인으로 하여금 점점 오래 방에 머물게 한다.
‘스마트’한 세상이 열리면서 나가지 않는(않아도 되는) 경향은 강화된다. 지난 몇 년간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대면’ 관계는 상대화된다. 대면은 이제 당연한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된 것이다. 세계로 열리는 문이나 창이라는 비유는 물리적인 만큼이나 가상적이다. 하지만 정보혁명의 시대에는 현실을 대신하는 코드들의 세계에 갇혀 있기 십상이다. 방의 역할이 강화되고 있다. 개인공간이 아닌 상업시설에도 ‘OO방’이 많지 않은가. 대부분 일탈적인 ‘OO방’은 ‘방’이라는 공간 특유의 비가시성에 대한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권인경의 방들은 자족적이지 않고 계속되는 연결망이 특징적이다. 내부와 외부가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고 이러한 변화무쌍한 공간관은 이와 연동되는 시간관과 연결된다. 현대의 공간은 시간과 밀접하다. 철학적으로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철학자 칸트는 시간과 공간을 존재의 기본적 범주로 가정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키는 이성의 결과이다. 시간과 공간을 연결해서 사유하는 현대는 근대 보다 동적이다.
개인이 선재하는 구조에 맞추기 보다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면(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치유라면) 중심의 이동이 필요하다. 조너선 스미스는 [자리잡기 to take place]에서 명사적인 성스러운 공간(sacred space) 보다는 자리(place)에 대한 사회적이고 동사적인 이해를 강조했다. 저자에 의하면 공간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사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자리란 수동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라 인식의 능동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경험이 공간 내에서 우리에게 방위를 설정해주고 자리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인간이 위치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리를 존재하게 한다는 [자리잡기]의 결론은 인간과 공간을 연결시키며 치유와 자유를 찾아가는 작품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선험적 공간이 아닌 찾아내야 하는 자리는 시간성을 중시한다. 그리고 시간은 무엇보다도 서사이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기억 시리즈에서
‘기억’이라는 키워드는 시간과 관련된 범주이다.
파노라마처럼 이어지는 공간들은 관객에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속에 많이 쟁여져 있는 시공간만큼이나 빠른 보폭을 요구한다. 국면의 빠른 전환은 대도시를 통과할 때의 경쾌한 느낌을 준다. 대도시에서 촘촘하게 자리하는 방들은 철저히 계층적이다. 가난한 1인 가구의 허름한 주거지가 된 고시원부터 시작해서, 보다 보편적으로는 아파트의 방들이나 오피스텔이 그렇고,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초고층 펜트 하우스까지 공간은 가장 값비싼 물적 자원이다. 그것은 개인이 경제적으로 어느 위치에 있는지 좌표를 찍어줄 만큼 물신적 체계이다. ‘풍요한’ 현대사회가 빈부격차를 늘려가면서 빈촌과 부촌의 차이는 확연하다. 방은 초라하든 화려하든 개인의 심리적 연장이자 보호 역할을 맡는다. 우리나 공동체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만, 현대사회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인간을 분리시킨다. 인간은 생산/소비적 체계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구조가 내면화 되어 개인은 필사적으로 자기 영역을 확보하려 한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귀는 이어폰에 눈은 스마트폰에 고정된 많은 사람들이 밀집 안에서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느라 애쓴다. 사회적인 일 뿐 아니라, 물리적 공간, 자아에 대한 확실한 정체성의 요구까지 그러하다. 하지만 실제로 그게 힘들기 때문에 상처받고 방어적으로 된다. 권인경은 이전에 도시 공간을 무대로 했지만, 요즘 작업은 그러한 거시적 공간만큼이나 방 같은 작은 공간에 집중한다. 작은 공간 또한 큰 공간처럼 복잡한 미로 같은 연결망을 가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방이 누군가의 내면 공간이라면 그곳에 들어가는 통로는 간접적일 것이다. 미로가 주술적 방어의 역할을 하기도 했듯이, 타자에게 가는 길은 여러 매개를 거쳐야 한다. 매개들이 없다면 그것은 갑작스러운 폭력 또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기적일 것이다. 누군가의 방은 아파트라는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주생활 방식을 소재로 하면서 촘촘하게 배열되었다. 각각의 공간들, 또는 같은 공간을 다른 시점에서 보는 공간들이 여러 시점에서 포착된다. 아파트는 그 형태 자체가 여러 공간을 하나의 면에 종합시키기에 적당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푸른색과 붉은색 버전의 아파트가 등장한다. 건축적 풍경과 잘 맞는다고 볼 수 없는 붉은 색 계열은 그동안 푸른색 계열을 많이 써온 것에 대한 상보(相補)적 차원이다. 푸른색 아파트에는 낡아서 금이 간 것 같기도 하고 나목의 그림자 같기도 한 선들이 뻗어있다. 푸른색 아파트는 제조사 상표를 자랑스레 걸고 있는 집값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도색 하는 한국의 아파트 색상이 때로 생경함을 보여준다. 새 아파트는 첨단 문명의 산물인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자연을 따라간다. 벽에 간 금과 나뭇가지의 배치는 물리적으로 시간의 축에 따른 에너지의 분포를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불 켜진 방들이 평행하게 배치된 아파트 전면과 화면의 각도를 맞췄다. 권인경의 작품은 어느 방에 특별히 초점이 맞춰지지는 않는다. 공간을 최대한으로 절약하기 위해 사각형 건물에 사각형 방들이 빼곡한 전형적인 도시 주거지 풍경과 관련되지만, 이러한 시점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거의 전지전능한 시점이다. 그것은 작가가 풍경의 외양을 빌어 방들을 추상적으로 배치한 것이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시공간의 접합은 수직수평의 축을 따라 다소간 질서 있게 배치되고 잡다한 꽃들이 꽂힌 화병의 배경처럼 추상적인 단색으로 칠해진다. 물론 아파트 외벽의 색일 수도 있다. 푸르거나 붉은 단색조의 평면은 일종의 여백같은 역할을 하는데, 실내 풍경에 하늘같은 주변 공간을 끼워 넣었듯이, 붉은 평면은 작가가 엿보고 싶은 방들을 끼워넣는 바탕이 된다. 작가는 ‘동양화의 여백은 무한의 공간’이라고 말하며, 이는 작품 속에 평면으로 나타난다. 대개 아크릴로 칠해진다. 이 평면은 여백처럼 신축적이어서 얼마든지 많이, 그리고 깊이 공간을 쟁일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여백은 숫자 0과 같은 위상을 가진다. 조너선 스미스의 [자리잡기]에 의하면 영(0)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고 자체로는 의미가 비어있으면서도 중요한 차이를 표시한다. 그러면서도(십진수 체계에서처럼) 다른 숫자들과 결합할 때면 의미로 가득 찬다. 그것은 불연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유에 연속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0을 언어학적으로 해석하면, 특별하게 ‘의미가 없으면서도 의미작용을 표시’(레비 스트로스)한다.
권인경의 작품에서 방들 사이의, 그리고 방안과 밖을 연결시키는 단색의 여백은 차이를 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실내 풍경이 있는 작품은 그 배경을 푸른색으로 해서, 마치 하늘 위에 떠 있는 탁 트인 느낌이다. 여러 방과 창문으로 구획된 실내에는 이미 많은 살림살이로 가득하고 가구를 뒤덮은 문자들 또한 그곳이 사람이 사는 곳임을 알려준다.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같은 단색의 바탕 면은 동양화의 여백에 해당되는 유연한 공간이다. 경관 좋은 창밖의 하늘과 실내가 같은 색이다. 작가는 안과 밖이 통하기를 바란다. 구획된 창들에 가득한 도시 풍경은 각각이 그림 같다. 그림이라는 창 안의 또 다른 창들인 셈이다. 그 창들 안에는 창으로 가득한 건물들이 자리한다. 빽빽한 건물 숲이 있는 작품 아래 화면에 작가는 붉은색 플라스틱 의자 하나를 그려 넣었다. 저 많은 건물 중 나의 자리는 어디인가를 묻는 듯하다. 집 없는 사람이 수많은 집들을 보고 한숨 쉬며 하는 말처럼 말이다.
밀집된 도시 저편에도 붉은 빈 의자가 놓여 있는데, 도시가 푸른 색감이어서 작아도 눈에 띈다. 떠 있는 태양과도 같이 귀한 그 빈 자리는 산과 물 등 자연에 더 가까이 있다. 소외된 김에 자유로워질 가능성을 말하는 것일까. 기억이라는 키워드는 고서 꼴라주를 포함하여, 여러 불연속적인 장면이 공존하는 작품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기억이란 연결(특히 불연속적인) 그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결은 재료들 간에도 일어난다. 작품 [떠오른 기억들 1](2023)은 옻칠지에 꼴라쥬, 수묵, 아크릴 같은 여러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건축적 구성으로 엮인 장면들은 실내와 밖, 그때와 지금을 연결시킨다. 화면 안의 사각형들은 창틀인지 액자인지도 모호하다. [떠오른 기억들 2](2023)에서 구획된 실내 공간 여기저기에 자리하는 많은 식물들과 난데없이 흐르는 물길, 그리고 작은 새 한 마리, 여기에 더해진 고서의 글자들까지 안빈낙도의 장소같다.
작품 [떠오른 기억들 3](2023)은 열린 방문 사이로 보이는 방에서 창문과 그 밖의 풍경까지 포함되어 있다. 상자 속에 상자들이 계속 열리는 듯하다. 기억이나 꿈의 메카니즘도 계속 열리는 상자처럼 이어지는 것이며, 권인경에게는 그림 또한 그렇다. 작가는 ‘기억들은 침대의 모서리에, 책장 사이에, 방의 한구석에 서려 있는데 때로는 되살아난 방의 조각들로 인해 깊숙이 있던 기저의 기억들이 떠오르며 활성화되고 당시의 정서가 소환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기억과 냄새의 관계를 설득력 있게 묘사한 바 있다. 방은 기억된 냄새로서의 공간이기도 하다. 권인경의 작품 속 방에서 그토록 많은 식물들이 자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다수의 작품들에 붙여진 고서 또한 그렇지 않을까. 과거와 내적으로 접속하게 하는 기억은 눈에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시각적 관습을 상대화시킨다. 꿈처럼 시공간을 종횡무진 연결시킬 수 있는 기억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다.
작품 [그날의 기억 1](2023)에서 화면에 꼴라주한 고서는 장식적인 역할을 하면서 마주한 자리들에 쌓였을 법한 이야기들을 상징한다. 해가 드는 창가, 풍성한 식물들은 빈 의자들만 마주한 공간을 충만하게 한다. [그날의 기억 2](2023)에서 식물들은 화면과 평행하게 배열되어 있어 마치 패턴 같으며, 이는 고서 꼴라주가 화면의 평면성을 나타내는 것과 조응한다. 작품 [그때의 기억](2023)에서 산기슭의 고층 건물 밀집 지대는 자연과 경쟁하는 듯하다. 화면 앞쪽에 놓인 붉은 화분은 눈앞의 풍경이 창밖의 풍경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푸른색은 실내와 밖의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식물 또한 실내/실외를 교란시키는 요소로 권인경의 작품 속에 풍부하게 나타나며, 단독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번 전시에서 붉은색은 화병 하나를 크게 확대한 작품의 배경으로도 등장한다. 꽃이 인간, 특히 여자와 비유되곤 했으니 권인경이 관심이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작가는 요즘 인간을 비롯해서 ‘내가 지나쳤던 것들이 다가왔다’면서, 작품 또한 ‘자연스럽게 끌리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권인경의 꽃은 그것의 전형성을 상실한다. 붉은 배경의 화병은 어울리지 않는 꽃들의 조합으로, 병이라는 용기(容器)와 단색으로 칠해진 배경이 아니라면 더 어수선해 보였을 것이다. 어디선가 온 잡다한 종류의 꽃들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지만 어울림은 없다. 생화인지 아닌지도 불확실하다. 도시, 공간, 방 등에 관심을 가져온 작품의 맥락에 의하면, 그것은 이질적인 것들이 유기적인 종합됨 없이 한데 모여있는 상태를 말한다.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거의 무시하고 각각의 식물 줄기들 모두에 방점을 찍었다. 투명한 병은 감춰지곤 하는 뿌리 없는 존재들을 드러낸다. 가장 아름다울 때 꺽여 화병에 꽂힌 후 서서히 죽어가는 꽃들은 야생의 생명력을 결여한다. 현대사회 또한 이미 완료된 것을 취해 짧게 사용하고 폐기하곤 한다.
발생하고 성장하는 시간성을 억압한다. 전체적 조화를 이루려면 어떤 것은 강조되고 어떤 것은 약화 되어야 하는데,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있는 형국이다. 도시인들도 이런저런 꾸러미는 속에 임시방편적으로 집합되어 있을 따름이다. 보편적인 공감대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이전 시대의 관념은 껍데기만 남아 정치인들의 공허한 목소리에 담긴다. 반면 또 다른 큰 꽃병 그림은 큰 꽃과 작은 꽃이 균형을 이루고, 단색조의 바탕색도 아래위로 나누어져 있어, 보다 안정감 있다. 배경색들은 꽃의 색을 반향하기도 한다. 화병을 덮은 문자들은 유리 꽃병과 달리 불투명하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보여서 말할 필요가 없는 상태와 달리, 그것은 말 그대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듯한 모습이 연상된다. 서사적인 것은 시각성에 비해 시간을 도입하고 이러한 지체는 개인에게 보다 융통성 있는 시공간을 제공한다. 인간끼리 말을 하고 말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는 인간들 대신에 사물과 말하고, 더 나아가 사물과 사물이 말하는 시대를 앞당기려 애쓴다. 물질문명의 불균형은 자연의 모델을 참조함으로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식물의 자연성을 강조하려 할 때 작가는 수묵을 쓴다. 이번 전시에서 수묵으로 자유롭게 그린 식물의 잎 새들은 식물이 필요한 빛을 향해 거침없이 쭉쭉 뻗고 있다. 프랙털 이론처럼 하나의 형태 안에 그것을 반복하는 작은 형태들이 빼곡한 식물도 있다. 식물로 대변되는 자연에도 치열한 경쟁이 있겠지만, 그들의 자리는 순리에 따른다. 자연의 법칙에 비해 인간의 규칙은 더 억압적이다. 예술은 자연이라는 영원한 모델로 회귀하려 한다. 자연은 맹목적 운명이 아니다. 인간은 마치 자연으로부터 자율성을 쟁취한 양 생각하므로 자연보다는 생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생명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대조한다. 그에 의하면 생명이란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이다. 생명이 ‘자극에 대한 반응의 독창성’(화이트헤드)라면 예술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선영(미술평론가)
An Open Room
In this exhibition, Kwon Inkyung focuses on the space called a room. A room is considered an extension or expansion of an individual. When writer Virginia Woolf spoke of ‘A Room of One’s Own’, it would have been a kind of platform open to the world rather than an autistic space. This is because art is open. However, being open presupposes being closed before that. If there is no self, one will simply be absorbed into the world, and if there is only oneself, the world will be nothing more than a mirror reflecting oneself. Both extremes are problematic. A living organism is fluid in closing and opening even at the level of the cell membrane. Only then can the being survive well in the world into which it is thrown. The psychological dimension is highlighted in a ‘private room.’ The artist says that the works in this exhibition deal with “what happens in the room, the minimum resting space for each human being, psychological situations, thoughts that come to mind, and objects collected.” The ideas for these works started from observations of an acquaintance who was trapped in her own space, but such adversity is only a matter of degree and rather, a common experience of many people today.
Even in the same external scene, there are different individuals looking at it, and such individual spaces appear in the works. However, the problem is that the perspectives of individuals in different positions are not accepted equally. The problem is that even though the perspectival world has passed, some strong dominant viewpoint remains fixed. A fixed system ultimately changes in the long run, but the problem is that time for an individual is too short. The fact that Kwon Inkyung’s work uses so many viewpoints to the point of being somewhat confusing comes from a critical awareness of the dominant perspective. The scene or landscape unfolds along architectural structures, but the structures are not as rational as actual architecture. A new space can come in between spaces any moment, or it can disappear again. It is a tightly divided structure with many spaces connected to one another on a single canvas. Rather than a single story according to linear movement of rational space, various stories are told polyphonically. A separate, independent space is a physical and psychological resource that everyone wants in this age.
Just being able to be in a room provides a sense of relief from external social relationships. One may go out, but it is one’s own choice and not to be forced. No people appear in the works. However, the scenes of the rooms show traces of people. The artist says that psychological space should not be “just a trace” and that the goal is to keep “records of different places”. It appears not only in contemporary objects imbued with personal memories, but also in the form of collage of old books. Memories are not limited to the present but travel across time. Collages of old books, mainly used for furniture or architectural structures in the works, fixate ‘the moment when words are spoken’ and emphasize that ‘language is embedded in life.’ Although it is an archaic language because it was written in old books, it would also have been the dominant language of an era and constitute the subject, just like today’s common language. According to the discoveries of anthropology and linguistics, human beings eventually become human through the dominant language of the society. However, humans face the schizophrenic condition of language itself, where object/sign and signifier/signified are separated.
A ‘patient’ is simply someone who reacts more sensitively to this condition. It is a love-hate structure where you have to belong but you do not want to belong completely. According to Chaosmose by Félix Guattari who resists all kinds of structural theories including psychoanalysis, the Symbolic Order weighs down the intangible world like a deterministic leaden cloak and the fate of death. According to him, words (utterances) become empty when they are used under the control of textual semiotics fixed at the level of law, that is, the level of control of facts, motions, and emotions. Guattari has psychoanalysis in mind. According to Lacan’s psychological theory as interpreted by Madan Sarup, the subject is constructed through the Symbolic Order, so there is a place assigned to the subject by discourse even before the subject is born. When the Symbolic Order becomes an autonomous structure, will there be a place for humans? How free can humans be from this determinism? Comparing the structural space of a room to an individual and building an endless network of connections is a way of acknowledging the structure while trying to go beyond it.
Kwon Inkyung experiments with various forms, but she is not formalistic and ultimately, she speaks about life. It is natural for humans to appear in narratives about life, but there are actually no humans in her works. The chair that appears out of nowhere from time to time symbolizes the human presence, in short, a place that exists through absence. She suffers from a modern illness that derives from human relationships, but because she is an artist, she cannot always remain within herself. Her interest in ‘room’ is related to a situation in which someone close to her suffered from post-traumatic stress in his childhood, and later experienced collective violence unique to the meddlesome Korean society, resulting in his being cut off from the outside world. He has difficulty communicating verbally with others and rarely leaves his room, but he leaves the door slightly open. It is to leave a small passage for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However, the relationship between normal and abnormal is fluid. It is just a matter of degree, and the average person is not much different. The instinct to seek protection from the unfriendly outside world causes an individual to stay in his or her room for longer and longer periods of time.
As the ‘smart’ world opens up, the tendency not (have) to go outside is strengthened. Over the past few years of the COVID-19 pandemic, ‘face-to-face’ relationships have become relativized. Face-to-face contact is no longer a matter of course, but an option. The metaphor of a door or window opening to the world is as virtual as it is physical. However, in the age of information revolution, people are often trapped in a world of codes that replace reality. The role of the room is being strengthened. Aren’t there many ‘OO rooms’ not only in private spaces but also in commercial facilities? Many deviant ‘OO rooms’ are made probably because of the sense of relief one feels about the unique invisibility of the space called ‘room’. Kwon Inkyung’s rooms are not self-sufficient but characterized by a continuous network of connections. The inside and the outside are linked to each other like the Möbius strip, and this kaleidoscopic view of space is interlocked with the view of time that is linked to it.
In To Take Place, Jonathan Smith underlined the social understanding of place as a verb rather than as a noun that implies the sacred space. According to him, space is not given but created by human projection.
The place that is not an a priori space but must be found puts emphasis on temporality. And time is, above all, narrative. In the Memory series included in this exhibition, the keyword ‘memory’ is a category related to time.
The spaces connected like a panorama provide spectacles for the audience. They require paces as fast as the space and time that are piled up within them. The quick transition of phases provides exhilaration that one feels when passing through a big city. The rooms that are closely packed in large cities are thoroughly hierarchical. From gosiwons, small accommodations for test-takers and students, that have become shabby residences for poor single-person households, to apartment rooms and efficiency apartments more generally, and to high-rise penthouses overlooking downtown streets, space is the most expensive material resource.
Whether shabby or extravagant, a room serves as a psychological extension and protection of an individual. Although there are expectations for us and the community, modern society fundamentally separates humans from humans. Humans relate to each other through production/consumption systems. As this structure is internalized, individuals are desperate to secure their own territory.
Lee Sunyoung (Art Critic)
ARTIST CV
Education
2012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동양화 전공 졸업(박사)
2004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석사)
2002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졸업(학사)
Selected Solo Exhibitions
2023 열린 방, 갤러리밈, 서울
2022 숨겨둔 이야기, GS 타워 스트릿 갤러리, 서울
피어난 틈, 소노아트갤러리, 서울
2021 넘어진 자리 Sigmoid Curve, 도로시 살롱, 서울
2018 마침내 드러난 기억(한국메세나 후원), 갤러리밈, 서울
2016 장소의 기억, 갤러리밈, 서울
2015 상상된 기억들 Imagined memories(서울문화재단후원), 갤러리 아트비엔, 서울
2013 Heart-Land-서울시립 미술관 Emerging Artist 선정전, 갤러리 그림손, 서울
L’ÉCHAPPÉE BELLE 주목할 만한 작가전(주 프랑스 한국문화원 공모당선),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 파리, 프랑스
2011 도시-조망과 은거의 풍경-서울문화재단후원, 가나아트스페이스, 서울
2009 도시-순간의 지속-서울문화재단후원, 갤러리 이즈, 서울
2007 도시-시간의 공존 City-The coexistence of time(문예진흥기금, 한전 프라자 갤러리 기획공모당선),
한전프라자갤러리, 서울
2006 도시-변화 그리고 반영 City-Change and Reflection(문화 일보 기획공모당선), 문화일보 갤러리, 서울
2005 도시_일상의 삶 City-A daily life, 공평아트센터, 서울
Selected Group Exhibitions
2023 ordinary world-베를린 주재 한국문화원 전시, 베를린, 독일
드로잉 박스, 신촌 아트레온 갤러리, 서울
2021 수:법천을 찾아서, 대덕문화회관, 대전
The next meme in Insadong, 갤러리 라메르, 서울
2020 서울산수, 서울시청사 본관3층, 서울
화가가 본 문화유산, 덕수궁 중명전, 서울
깍지, OCI 미술관, 서울
용동묵조-2020 중한당대수묵국제교류전, 신베이시예술문화센터, 대만
왼손의 움직임, 금천예술공장, 서울
2019 묵·비묵 2019 중한당대수묵교류전, Aglow art space,
대만 / 중국소주일전하문화중창산업원, 상예술센터, 쑤저우, 중국
Pop up exhibition, The ballery gallery, 베를린, 독일
역단의 풍경, 자하미술관, 서울
Brisas de Corea, Galeria Saro Leon, 라 팔마스, 스페인
이른 꽃, 도로시 살롱, 서울
Hanji translated, Lalit Kala Akademi Regional Center, 첸나이, 인도
2018 보다, 서울 전-기획초대전, 겸재정선미술관, 서울
City-Unfamiliar landscape, 워싱턴 한국문화원, 워싱턴 DC, 미국
유유산수, 세종문화회관, 서울
도시풍경, 대전시립미술관 창작센터, 대전
외 다수
Awards
포스코미술관 신진작가공모전(2016), Korean Artist Project (한국사립미술관협회, 2016),
서울시립미술관 Emerging Artist 선정(2013), 송은미술대상선정작가(2007), 중앙미술대전(특선, 2003)
Collections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2023, 2017, 2010, 2008), 양평 군립 미술관, 서울 동부지방검찰청 신청사, 우이경 전철(정릉 역사), 충북대 병원, 미스터피자, 갤러리밈, 가회동 60 갤러리, 갤러리 이즈, 안국약품 갤러리, 화봉갤러리, 63스카이아트갤러리,
국내외 개인소장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