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준비 중입니다.
바람으로 서는 것들
Kim Seil
M’VOID is a program that plans and presents exhibitions of leading artists at home and abroad who question contemporary aesthetic values while strengthening their works with insights.
ABOUT
타자의 정황
안소연/미술비평가
조각가 김세일이 말한 “바람으로 서는 것들”은 조각일 테지만, 그때의 조각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서 있는” 형상은 쉽게 떠올려지지 않는다. 강가에 서서 바람이 일으키는 물살과 노을과 돛의 움직임을 보면서, 방금까지 두 손으로 나무를 깎다가 강으로 나온 조각가는 바람이 일으켜 세운 형상들에 둘러싸여 조각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주로 인체 형상을 띤 김세일의 조각은 수직으로 직립해 있으나, 가만히 보고 있으면 형상의 물리적 관계와 구조 안에서 똑바로 “세워져” 있다는 정황을 눈치챌 수 있다. 몸은 가장 오래된 조각의 대상으로, 자신과 닮은 형상을 이 세계 안에 가져다 놓으려는 인류의 오래된 소망이 담겼다. 작은 돌멩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날카로운 석기로 사람 형상을 새기기 시작한 몇만 년 전 동굴 속 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흙이 돌이 되고 돌이 조각이 되고 조각이 사람이 되는 변환의 과정 속에서 살아 있는 자신의 존재를, 혹은 삶과 죽음 사이의 정황을 조금 더 알고 싶었으리라.
김세일이 가져다 놓은 조각들은 때때로 그러한 오래된 질문을 우리 앞에 다시 세워 놓는다. 나에 대해, 사람에 대해, 그것을 닮은 조각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이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들이 이어진다. 그가 나에게 물었다. 조각이 어떻게 설 수 있습니까? 그는 내게, 조각은 (사람처럼) 서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너무 크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은 사람 모양의 조각을 만드는 동안, 그는 그것을 바닥에 (잠시라도) 일으켜 세울 방법을 골똘히 찾았을 테다. 같은 평지 위에 함께 “서 있는” 김세일의 인체 조각상들은 그 내부의 해부학적 토대 위에서 조각적 규범에 적합한 포즈를 취하기보다는, 되레 양감과 중량감을 하염없이 덜거나 내부를 텅 비우는 것을 자처하며 하나의 물질적인 형상으로서 간신히 존재하는 법을 드러낸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를 비우다 보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조각과는 점점 더 멀어질 테지만, 김세일은 조각적 방법과 사유를 좇아 그것의 적합한 존재 방식, 즉 그것이 현실 세계 안에서 살아갈 적당한 모양새를 찾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조각을 지속적으로 유예시키는 일에 가담해 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몇 해 전, 김세일의 개인전 《또 하나의 몸》(2023)에서 ‘촉’ 시리즈의 인체 형상 조각과 마주했을 때, 두 개의 몸이 서로 꼭 안은 채 결속되어 있는 모습은 온전한 육체이기보다는 그것을 본뜬 주형(mold)의 일부이거나 주물(cast)의 잔해처럼 느껴졌다. 그렇다. 인간 형상을 닮은 “조각”인 게 분명해 보였다. 그것은 모두 불완전하고 불안정해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석고로 만든 조각의 윤곽이 바닥으로부터 수직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까닭은, 접촉하고 있는 두 개의 몸이 만들어낸 한시적인 공간의 출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촉3>(2023)의 경우에는 “또 하나의 몸”을 서로 의식하며 마주하고 있는 두 개의 몸이 허리부터 한쪽 발끝까지, 마치 육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몸의 일부가 서로 끝(허리)과 끝(발)이 연결되어 서 있는 모양새였다. 첫 인상에서 로댕((Auguste Rodin)의 <대성당(La Cathédrale)>(1908)을 연상시켰던 그 작업은, 둘 다 발꿈치를 든 채로 마치 함께 서 있기 위해 손을 맞잡은 것처럼 허리춤을 연결해 놓았는데, 김세일은 무엇을 의심했던 것일까, 끝이 서로 닿은 둘의 발등에 둥근 돌 하나를 눌러 놓았던 것이다. 거기 그렇게 서 있으라고 발과 발 사이에 기울어진 각도를 둥근 돌로 채워버렸다. 다른 조각들은 어땠나? 다리가 나무 막대처럼 변형된 몸들은 서로 한쪽 다리만 가진 채 서로 결속해 있어 마치 둘이 아니라 한 사람의 몸처럼 비로소 두 개의 다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김세일은 둘 사이에 (공동의 것으로 인식되는) 막대 다리 하나를 더 세워 세 개의 꼭짓점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존재의 결합을 드러냈다.
이번 전시 《바람으로 서는 것들》에는 한 무리의 서 있는 인체 형상 조각들이 줄지어 있다. 여러가지 재료로 만들어진 인체 형상 조각들은 일제히 ‘촉’ 시리즈의 연장선에서 어떤 정황을 드러낸다. 살아 있는 인간 형상이 조각이 되기 위한 정황으로서, 그것은 기꺼이 몸의 동세라 할 수 있는 마디마디의 적합한 각도를 연결함으로써 비로소 일으켜 세워지는 조각의 의지다. 몇 가지 서로 다른 조각의 재료를 사용해 서 있는 인체 형상을 제작한 김세일은, 두 발로 서야만 하는 취약한 육체를 하나의 물질적인 형상으로 존재하게 하기 위한 정황을 살폈다. 일련의 재료로 깎거나 주물로 떠낸 인체 형상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바닥으로부터 서 있다.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한 사람의 몸은 허공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켜 놓은 형상인데, 석고를 직조하여 만든 것 같은 이 기다란 인체 형상은 자신의 몸을 지탱시킬 만한 커다란 받침대 대신 묵직한 돌 하나를 발등에 올려놓음으로써 스스로 중력에 대해 가벼움을 취한다.
화분과 캔버스, 김세일은 조각을 세우기 위해, 말하자면 어떤 물질을 공간 속에 일으켜 세워 (잠시라도) 형상을 지니고 살아가게 하기 위해, 화분과 캔버스의 정황이 필요했던 것 같다. 식물처럼 화분 속에 자신의 육체를 가두고 있는 형상들은, 다소곳이 모은 두 다리의 취약함에도 불구하고 식물의 줄기와 이파리처럼 자라나는 사람 모양의 조각을 화분이라는 받침대 안에 영영 가두어 버린 조각가의 속내가 드러난다. 물구나무 선 채 웅크린 육체는 또 어떠한가. 물질로부터 일으켜 세운 듯한 저 형상들의 정황은 스스로 중력에서 벗어나 허공에 웅크리고 존재하는 명문을 찾고 있다. 캔버스를 이용한 ‘벽’ 시리즈는 임의의 지지체 위에 기생하던 얕은 공간으로서의 홈을 석고로 떠내 캔버스와 결합시킨 작업으로, 그 안에도 인체 형상이 흐릿한 요철로 자리한다. 이를테면 마모된 벽처럼 텅 빈 공백의 흔적을 인체 형상의 흐릿한 요철로 캐스팅한 김세일은, 소조 기법의 과정 속에 숨겨져 있는 수수께끼 같은 정황들을 가져다가 물질에서 형상으로 나아가는 조각의 존재를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
한때, 가는 철사로 입방체나 비정형의 양감을 지닌 입체를 구축하기 위해 선들을 서로 결합시키며 일련의 각도로 벌려 두기도 했던 김세일은 어떤 존재의 “일어섦”을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거대한 양감이 만들어낸 설명할 길 없는 수많은 공백 내부에 인체 형상의 조각을 두고, 그것을 일으켜 세울 “또 하나의 몸”과의 만남을 그는 차츰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으로 서는 것들”이라는 시의 언어를 통해 조각가 김세일이 그리워했던 것은, 한 손에 작은 돌멩이를 쥐고 자신과 닮은 형상을 새겼던 조각가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설 수 없는 취약한 돌 조각을 손에 쥐고 그것을 하염없이 매만지며 이 육체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상상했던, 사라진 조각가들의 마음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서 있는” 인간 형상 앞에, 시가 된 낱말들 앞에 어떤 사람들이 멈춰 서서 서성이는 마음을 가져다 둔다면, 그 서성거림도 잠시 조각이 될 수 있을까.
——
김세일은 전시 제목과 동명의 시(詩) “바람으로 서는 것들”을 써서 전시장 벽에 옮겨 적어 놓았다.
바람으로 서는 것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곱씹게 되는 질문이었다
조각은 서야 산다고 배운다
이것도 어려운 문제다
나무를 깎다가 멈추고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다가
낙동강변 정류장 구석에 앉아
문자라도 보내는 척
시로 시를 부른다
문득 바람이 분다
일렁이는 물결에
노을이 출렁이고
돛이 팽팽해진다
바람으로 서는 것들
잠시 조각된다
-안동에서 김세일
SELECTED WORK
Preparing for the exhibition.
INSTALLATION VIEW
Preparing for the exhibition.